사악의 묵인

연구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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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의 묵인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과의 관계

––왜 사악이 묵인되었나?

––원칙의 옳고 그름 

––도덕적 감각

––하나님은 사악을 묵인하셨으며, 선을 이루도록 그것을 지배 

––아담의 시험은 어리석은 희극이 아님

––아담의 유혹은 심한 것이다

––아담은 고의적으로 죄를 범했다

––하나님은 사악의 창시자가 아니시다

––죄의 처벌은 불의하지 않으며, 너무 엄하지도 않음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을 정죄 하시는데 전시된 지혜, 사랑, 공정

––하나님의 일반 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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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악이 묵인되었나?

     사악은 직접으로나 관계가 적게나 어떤 종류이든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무엇이든, 그리고 불행을 야기하는 근본 요소이다. ––웹스터(Webster) 

     그러므로 이 주제는 인간의 병, 슬픔, 아픔, 약점과 죽음에 관하여 질문할 뿐이 아니라, 이 모두를 더 깊이 검토하여, 이것들의 첫째 원인인 죄와 죄의 치유도 숙고하려고 한다. 죄가 사악의 원인이므로 죄의 치유가 사악을 영구히 없애는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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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구적인 마음에 다음 질문들보다 더 종종 떠오르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아마 없을 것이다

(1) 왜 하나님께서 사악이 현재 지배하도록 묵인 하셨나?

(2) 왜 하나님께서 우리 첫 양친을 완벽하고 고결하게 창조하신 후, 사탄이 그들을시험하도록 묵인하셨나?

(3) 왜 하나님께서 금단의 나무를 허락된 좋은 나무들 사이에 심어두시었나?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다음 질문이 떠나지 않을 것이다.

(4) 하나님께서 인간 타락의 모든 가능성을 방지하실 수 없었을까?

     그 어려움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일어난다. 하나님께서 죄가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실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방지하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은 죄의 현재 묵인이 궁극적으로 보다 더 큰 이로움이 되기 위하여 계획 되어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충분히 증명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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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체로서 본 하나님의 계획은 밟은 방침의 지혜를 증명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묻는다. 모든 것이 가능하신 하나님께서 사탄의 계획이 완전히 성취 못하게 알맞은 때에 간섭하실 수 없었을까

     의심할 여지없이 그리하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그러한 간섭은 하나님 자신의 목적들을 성취하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그의 목적은 그의 율법이 완전함과 권세와 의로운 권력이 있음을 나타내려 하시고, 율법 위반에서 유래된 사악한 결말을 인간과 천사들에게 증명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밖에 바로 그들의 본성 안에는 성서가 진술하듯이 하나님에게도 불가능한 무엇이 있다.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 (6:18) "½º½º·Î Àڱ⸦ ºÎÀÎÇÏ½Ç ¼ö ¾ø´Ù."(µóÈÄ 2:13)

     그는 틀린 행위를 하실 수 없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의 근시적인 개념이 일시동안 무한하신 숨긴 지혜 샘들을 식별하지 못할지라도, 그의 피조물들을 영생으로 안내하시기 위하여 그는 가장 지혜롭고 최상의 계획밖에 택하시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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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서가 선언하기를, 만물이 주의 기쁨을 위해서 창조되었다. (4:11) 여기서 주의 기쁨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의 축복을 베푸시고 그의 영광스러운 신의 속성을 행사하시는 기쁨일 것이다. 자비하신 계획을 이루시는데 있어서 그가 사악과 악인들이 일시동안 활동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묵인하시긴 하지만, 그것은 사악을 위해서나 그가 죄와 연합하시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Ö³ÄÇÏ¸é ¡°ÁÖ´Â Á˾ÇÀ» ±â»µÇÏ´Â ½ÅÀÌ ¾Æ´Ï½Ã´Ï‚(½Ã 5:4)¶ó°í ±×°¡ ¼±¾ðÇϽñ⠶§¹®ÀÌ´Ù. ¸ðµç Àǹ̿¡¼­ »ç¾ÇÀ» Àû´ëÇϽÃÁö¸¸, ±×ÀÇ ÁöÇý°¡ ±×ÀÇ ÇÇÁ¶¹°µé¿¡°Ô ¿µ±¸ÇÏ°í ±ÍÁßÇÑ ±³ÈÆÀÌ µÉ ¼ö ÀÖ´Â ±æÀ» ¾Æ½Ã±â ¶§¹®¿¡ Çϳª´Ô²²¼­´Â ÀϽõ¿¾È »ç¾ÇÀ» ¹¬ÀÎÇϽŴÙ. Áï ÈѹæÇϽÃÁö ¾ÊÀ¸½Å´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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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의 옳고 그름

      모든 옳은 원칙에는 대응하는 그른 원칙이 있다는 것은 자명한 진리다. 예를 들면, 참과 거짓, 사랑과 증오, 공정과 부정 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 반대되는 원칙들이 작용될 때 그것들의 결과에 따라서 옳고 그름으로 분별한다. 작용 중, 결과가 유익 되고 궁극의 질서, 조화, 행복을 낳는 원칙을 우리는 옳은 원칙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불화, 불행, 파괴를 낳는 그 반대는 그른 원칙이라고 부른다. 작용하고 있는 이 두 가지 원칙의 결과를 선과 악이라고 부른다. 옳고 그른 원칙을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자발적으로 옳거나 그름으로 좌우된 지적인 존재는 옳거나 그른 것으로 지배되는 경우에 따라 덕행이 있다거나 죄 있다고 부른다.

도덕적 감각

     옳고 그른 원칙을 식별하는 이 기능은 도덕적 감각이나 양심이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이 도덕적 감각으로 하나님을 판단할 수 있고 그가 선하심을 인식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의와 공정을 증명하기 위하여 언제나 이 도덕적 감각에게 호소하신다. 그리고 아담 (Adam) 은 죄의 결과를 알기 전에도 같은 도덕적 감각으로 죄나 불의가 악이라는 것을 식별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피조물의 하류 계급은 이 도덕적 감각을 타고나지 않았다. 개는 약간의 지성을 가졌으나, 어떤 행동이 자기 주인에게서 칭찬과 상을 받게 되고, 어떤 행동이 꾸지람을 받게 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도덕적 감각의 정도는 아니다. 개가 훔치거나 죽여도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개가 재산이나 생명을 보호해도 덕행이 있다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개는 그의 행동의 도덕적 자질에 대해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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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옳고 그름을 식별하는 능력이 전혀 없거나, 오직 옳음만을 식별하고 행할 수 있게 만드실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을 그렇게 만드신다는 것은 오직 생명 있는 기계를 만드신 것이고, 그의 창조자의 정신적 형상을 만드신 것이 확실히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가 만드셨듯이 인간을 완벽하고 자유로운 존재로 만드시고, 그가 사탄의 유혹에서 인간을 보호하실 수 있었다

     그 경우에 인간의 경험은 선으로 제한되어있기 때문에 외부에서 오는 악의 제안이나 내부에서 일어나는 야망을 계속적으로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것은 영구한 미래를 미정으로 만들었을 것이며, 불순종과 무질서의 돌발이 언제나 가능성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밖에, 악과의 대조가 아니고는 선을 전혀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피조물을 에덴(Eden)에서 선으로 둘러싸서, 맨 먼저 선과 익숙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 후에 불순종에 대한 처벌로서 악에 대한 엄중한 지식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이브를 에덴에서 추방하시고, 그와의 친교를 빼앗으시고, 그들이 악, 어리석음과 죄의 매우 죄스러움을 영원히 알게 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하여 그들로 하여금 병, 고통과 죽음을 경험케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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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과 악의 결과들을 비교함으로서, 아담과 이브는 선과 악의 올바른 이해와 적당한 판결을 갖게 되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보라, 사람이 선악을 아는데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3:22) 선악을 아는데 있어서 그들의 자손들도 같다.

     오직 다른 점은 아담과 이브와 달리 그들의 자손들은 악에 대한 지식을 먼저 얻게 되고, 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천년시대에 그들의 심판관이시며 왕이 되실 주님이 그들을 구속한 결과로 선을 경험하게 될 때까지 충분히 실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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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덕적 감각이나 옳고 그름의 판단, 그리고 아담이 소유했던 그것을 사용하는 자유는 하나님과 유사한 중요한 특징들이었다. 옳고 그른 율법은 아담의 천부의 성질에 쓰여 있다. 그것이 꼭 신의 본성의 한 부분인 것처럼 아담의 본성의 한 부분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 (1:26)이나 하나님을 닮음 곧 이 원래 율법이 새긴 사람의 본성이 지워지고, 죄로 타락하는 영향을 통해서 원래 사람 본성의 분명한 윤곽을 잃었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그러므로 첫 사람 속에 있던 그것이 지금 사람 속에 있지 않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미워할 수 있는 능력을 함축한다. 그러므로 창조자께서 사랑하고 옳음을 행할 능력을 지닌 그 자신과 유사한 사람을 만드시는데 있어서, 미워하고 그름을 행할 대응하는 능력 없이 만드실 수 없다고 우리는 추론한다

     자유로운 도덕적 도구나 자유로운 의지라고 불리는 이 선택의 자유는 사람 본래의 재질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이 선택의 자유는 그의 모든 정신적 도덕적 능력과 더불어 그를 창조자의 형상으로 만들어 내었다. 6  천 년간의 타락 후, 오늘날 죄가 최초의 유사함을 지워버렸으므로 죄와 수반된 결과들로 보다 크거나 보다 작은 정도로 우리가 얽매어 있어 자유롭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죄가 지금 더 쉽고, 그러므로 의로움 보다 죄가 타락된 인류에게 더 마음에 들게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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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악을 묵인하셨으며, 선을 이루도록 그것을 지배

     하나님께서 아담이 죄를 단념할 정도로 많은 죄의 사악한 결과들의 생생한 인상을 그에게 주실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가 새삼 물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실제로 악을 경험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원히 도움이 되는 가장 틀림없고 제일 영속하는 교훈이 될 것임을 하나님께서 예견하셨다고 우리는 믿는다

     그래서 그 이유로 하나님께서 사람이 악을 선택하여 악의 결과를 느끼는 것을 방지하시지 않고 묵인 하셨다. 죄를 범하는 기회를 전혀 허락하시지 않았다면, 사람이 악에 저항할 수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그가 옳은 행위를 한 점에 있어서 미덕이나 공로가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정으로 그를 숭배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시다. (4:23,24) 

     하나님께서는 무식한 기계적인 봉사보다 지적이고 자발적인 순종을 원하신다. 하나님께는 이미 그의 뜻을 성취하는 무생물인 기계적인 매개들이 활동 중에 있는 것이 있으나, 그의 계획은 더 고귀한 것 곧 그 자신의 모양을 따른 지적인 피조물인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이해에 의거한 충성과 정성을 가진 지구의 주인을 만드시려는 것이다.

Worship.jpg (12948 bytes)      원칙들로서 옳고 그른 원칙들은 언제나 존재했으며 언제나 존재함에 틀림없다. 그리고 옳은 원칙만이 영구히 계속 작용할 것이지만, 하나님의 모양을 따른 모든 완벽하고 지적인 피조물들은 그 둘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데 자유로워야 한다

     성서는 우리에게 알려주기를, 그른 원칙 작용을 하나님의 목적을 ¼ºÃëÇÒ ¸¸Å­ 충분히 오래 묵인하신 뒤에, 그른 원칙이 작용함은 곧 영원히 끝날 것이며, 그른 원칙의 지배력을 계속 따르는 사람은 모두 영원히 죽을 것이라고 한다. (고전 15:25,26, 2:14) 옳은 행위와 옳은 행위자들만이 영원히 계속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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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Á÷°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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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질문이 다른 형태로 되풀이된다. 경험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악과 익숙해지게 사람을 만들 수 없었을까? 사정을 알도록 이끄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 즉 직관으로, 관찰로, 경험으로 확실히 진실하다고 인정된 근원을 통해서 받은 지식으로이다. 직관적 지식은 추론 과정이나 증명이 필요 없는 직접의 이해일 것이다

     이러한 지식은 필연적으로 당연히 모든 그의 피조물들 보다 우월하시며 모든 지혜와 진리의 영구한 기초이신 신성하신 여호와께만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과 악을 알게 되는 사람의 지식은 직관적일 수가 없다. 사람의 지식은 관찰을 통해서 올 수 있으나 그 경우에는 사람이 관찰하도록 악과 악의 결과들의 어떤 전시가 절대 필요했다

     이것은 어디에 어떤 존재 사이에 사악의 묵인을 함축한다. 그러면 다른 곳에 다른 것들 가운데서와 같이, 왜 지구상에 인간 가운데서도 악이 묵인 될 수 없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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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사람이 실례가 되어서 실지의 경험으로 그의 지식을 얻어서는 안 되나? 그렇다. 사람은 실지의 경험을 얻고 있으며, "천사에게 전시"가 됨으로 (고전 4:9) 다른 사람에게도 실례를 주고 있다.

아담의 시험은 어리석은 
희극이 아님

     아담은 예고로 악에 대한 지식을 이미 가졌으나 그것은 그가 시험하려는 시도를 제지하기에 부족하였다.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께서 창조자이시며, 그러므로 그가 그들을 지배하고 감독할 권리를 가진 분이라고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금지된 나무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2:17) 

     그러므로 그들이 악의 영향들을 일찍이 관찰하거나 경험해 본적은 없었지만, 악에 대한 이론적인 지식은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창조자의 사랑이 깃 들인 권세와 그의 유익한 율법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 유익한 율법으로 그들을 위험에서 보호하시려고 계획하신 그 위험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지혜롭게 묵인하신 유혹에 굴복했다. 이 묵인은 그의 지혜가 추적한 궁극의 방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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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수 밖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 첫 양친을 타락하게 한 유혹의 심한 정도를 이해하지 못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사소하게 보이는 범죄에 그렇게 엄한 처벌을 내리신 점에서 하나님의 공정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조금 반영하면 모든 것이 명백해 질 것이다. 성서는 여자, 연약한 한쪽이 어떻게 ²¿ÀÓ¿¡ 넘어가 범죄자가 되었나 하는 간단한 이야기를 말 한다

     그녀의 하나님과의 경험과 하나님을 익히 알고 있음은 아담이 경험하고 안 것들 보다 더욱 제한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먼저 창조되고 여자가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죄의 처벌에 대한 지식을 그에게 직접 전달하셨는데, 이브는 이 전달을 아담에게서 필시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실과를 따먹었을 때, 사탄의 거짓 허위진술을 신뢰한 그녀는 필시 불신과 모든 것이 사리에 맞지 않음을 약간 우려하긴 했지만, 범죄의 정도를 분명히 인식하지 못했다. 속았을 지라도 그녀는 범죄자라고 바울은 말했다. 더 밝은 빛에 대해서 범죄한 것처럼 그렇게 비난할만하지는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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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고의적으로 죄를 범했다

     이브와 달리 아담은 속지 않았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딛전 2:14) 그러므로 그는 죄에 대한 더 충분한 이해를 가지고 그가 틀림없이 죽는다는 것을 확실히 알면서 처벌을 받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범죄하였음에 틀림없다. 그가 선고된 처벌을 초래하도록 이 정도까지 분별없이 그를 강요한 유혹이 무엇이었던가를 우리는 쉽사리 알 수 있다

     그들은 그들의 창조자의 정신적 도덕적 유사를 지닌 완벽한 존재들이었기 때문에 완벽한 남자에게서 하나님 같은 사랑의 요소가 그의 사랑하는 동료인 완벽한 여자에 대하여 현저히 탁월하게 전시되었다. 죄를 인식하고, 이브의 죽음과 따라서 그의 손실을 (회복의 희망을 주시기 전이었음으로, 그러한 희망 없이) 두려워했기 때문에 아담은 절망하여 그녀 없이 살지 않겠다고 분별없이 결론을 내렸다.

     그녀의 교우 관계없이는 그 자신의 생존은 불행하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여, 그녀에게 판결이 내려 있다고 그가 아마 상상한 사형선고를 같이 나누기 위하여 그는 고의적으로 그녀가 저지른 불순종의 행위를 함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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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 바울이 제시하듯이 둘이 다 "죄에 빠진 것이다" (5:14, 딛전 2:14) 그러나 아담과 이브는 한 몸이지 ""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브는 자기의 행위가 아담에게 선고받게 촉진한 그 선고를 같이 나누었다. (5:12, 17-19)

하나님은 사악의 창시자가 
아니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셨기 때문에 죄와 그것의 결과에 대한 충분한 이해의 결핍으로, 죄를 받아드릴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셨을 뿐이 아니라, 죄에 익숙해 져서 그 익히 앎이 그의 도덕적 본질을 해쳐서, 점차 악이 선보다 더 그에게 마음에 들게 되고 더 바람직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는 아직 죄를 선택할 것이라는 것도 역시 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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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최종의 결과는 하나님께 대한 더 깊은 사랑이고, 그의 뜻을 반대하는 모든 것에 대한 더 큰 증오이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죄의 묵인과 상호관계가 있는 악들을 통해서 지금 가르치시고 있는 교훈들로 이익을 얻을 사람들 모두의 영구한 정의 가운데 견고한 확립일 것이다.


Çϳª´Ô²²¼­´Â »ç¾ÇÀ» ¹¬ÀÎÇϼÌÀ¸³ª »ç¾ÇÀÇ Ã¢½ÃÀÚ°¡ ¾Æ´Ï½Ã´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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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를 묵인하셨다는 논의의 여지가 없는 사실과 하나님을 죄의 창작자이며 선동자라고 비난하는 어떤 사람의 심각한 과오 사이에 광범한 구별이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나중의 견해는 모독이며 성서에 진술된 사실과 모순된다. 이 과오에 빠지는 사람들은 우리의 속죄물의 대가로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께서 베푸신 계획보다 또 다른 구원의 계획을 찾으려는 시도에서 일반적으로 그렇게 한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서 모든 죄와 사악과 범죄의 책임이 있다는 것, 인간이 그의 손안에 순결한 도구로서 억지로 죄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을 그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확신시키는데 성공하였다면, 그들은 우리의 죄를 위한 희생이나 어떠한 형태로든 자비도 필요 없고 다만 단순히 공정만이 필요했다는 이론을 위한 길을 개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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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서의 두 본문이(45:7, 3:6) 이 이론을 지지하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두 본문에서 사악이란 단어의 오해 때문이다. 죄는 언제나 사악이지만, 사악은 언제나 죄가 아니다

     지진, 대 화재, 홍수, 유행병은 재난, 사악일 것이나, 이들 어떤 하나도 죄가 아닐 것이다. 본문에서 인용된 단어 사악은 재난을 의미한다. 같은 헤브라이 단어가 시 34:19, 107:39, 48:16, 1:15에 고통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것이 시 27:5, 41:1, 88:3, 107:26, 51:2, 1:21에 고생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것이 삼상 10:19, 10:6, 94:13, 141:5, 7:14, 2:17에 재난, 역경, 심통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리고 같은 단어가 매우 많은 곳에서 해, 해악, 헌데, 상처, 불행, 비탄, 슬픔으로 표현되어 있다.

   사 45:7과 암 3:6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한 국가로서 그들과 만드신 그의 계약을 상기시키려 하셨다. 만일 그들이 그의 율법을 순종하면, 그가 그들을 축복하시고 대체로 세상에서 흔히 있는 재난에서 보호하시겠으나, 만일 그들이 그를 버리면, 그가 그들에게 징계로서 재난(사악)을 생기게 하실 것이라는 것이었다. (28:1-4, 15-32, 26:14-16, 23:6-11, 12-16을 봅시다.)

   그러나 재난이 그들에게 왔을 때 그들은 재난들을 징계로서가 아니고 사고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들에게 그들의 계약을 상기시키고 그들의 재난들은 그에게서, 그들의 교정을 위해서 그의 뜻으로 온 것이라고 그들에게 이야기 해주고 있다. 이 본문들을 하나님께서 죄의 창조자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은 부조리하다. 왜냐하면 그 단어들이 결코 죄를 언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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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ÀÏ ÀÌ°ÍÀÌ Á¦°ÅµÇ¸é, Àΰ£Àº °ïÃ溸´Ùµµ ¿­µîÇÒ °ÍÀÌ´Ù.

     이렇게, 하나님께서 모든 죄와 사악과 범죄 전부를 범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모든 인류를 죄와 죽음에서 역시 구원하게 하실 것임을 주장하면서, 그들의 거짓 이론, 즉 보편 구제설의 다른 하나의 부분을 위한 기초도 놓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죄를 원하시고, 죄를 범하게 하시고, 아무도 그를 저항할 수 없었다고 그들은 추론하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정의를 원하실 때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로 그를 저항하기에 무력할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모든 이와 같은 추론에는 인간의 가장 고귀한 자질이며, 그의 창조자에 유사의 가장 현저한 특징인 의지나 선택의 자유를 완전히 무시한다. 그리고 이론적으로 인간은 다만 당하는 대로 행하는 단순한 ±â°è·Î °ÝÇϽÃŲ´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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Àΰ£ÀÌ ±× ÀÚ½ÅÀ» À§Çؼ­ ¼±ÅÃÇϵµ·Ï ¹¬ÀÎ µÇ¾úÀ» ¶§, ±×°¡ ½Å°úÀÇ »ç±ÑÀ» ÀÒ¾ú´Ù.


     만일 이것이 그 경우라면 인간은 땅의 지배자인 대신에 곤충보다도 열등할 것이다. 왜냐하면 곤충들이 의심할 바 없이 선택의 의지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개미조차도 인간이 보다 큰 능력으로 대항하고 꺾으려 한다 할지라도 인간이 파괴할 수 없는 의지의 힘을 받았다.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억지로 죄를 짓게 하시거나 억지로 정의를 지키게 하시는 힘을 가지고 계시나, 그는 그러한 의향이 없음을 그의 말씀은 선언하고 있다. "그는 그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딛후 2:13) 라는 말씀과 같은 이유로 그는 시종 일관하게 인간을 억지로 죄를 범하게 하실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방식은 그의 의로운 성품과 상반될 것이며, 그러므로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만의 예배와 사랑을 찾으신다. (4: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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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 때문에 그는 인간에게 그 자신의 것과 같은 의지의 자유를 부여하셨으며, 인간이 정의를 선택하기를 원하신다. 인간에게 스스로 선택하게 묵인하신 것이 신과의 사귐과 ÃÑ¾Ö¿Í 축복에서 죽음에까지 타락하게 이끌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죄와 죄의 결과를 경험하지 않고 인간을 이론적으로 훈육하시려고 시도하신 것을 인간은 죄와 죽음에 경험으로 실제로 배운다.


Çϳ­´Ô²²¼­´Â Àΰ£À» ¾ïÁö·Î Á˸¦ Áþ°Ô ÇϽÃÁö ¾ÊÀ¸¼Ì´Ù, ±×·¯³ª »ç¶ûÀÌ ±ê µéÀÎ ÁöÇý °¡¿îµ¥ Àΰ£ÀÇ È¸º¹À» À§Çؼ­ ±¸Á¦Ã¥À» ÁغñÇϼ̴Ù.

     인간이 어떻게 할 가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는 인간을 불과 기계적 존재로 격하시키기 위한 구실로서,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되지 않고 도리어 인간에게 유리하게 작용되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스스로 선택하도록 속박 없이 남겨두면 인간이 취할 진로를 예견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죄와 죄의 쓴 결과를 실험적으로 맛보는 것을 못하게 막지 않고 그는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 모두를 최대한 구하실 수 있는 훌륭한 구세주 그리스도를 주심으로서, 인간의 첫 범죄에서 구원의 방법을 제공하실 것을 즉시 시작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유로운 의지를 가져도 그것을 오용(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한 그의 최초의 실패를 통해서 도움이 될 수 있게 하는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속죄물 뿐이 아니라, 이렇게 하나님 자신과의 화해를 제공하신 기회의 지식이 ±â¾àÀÌ À̸£¸é 모든 사람에게 증거 될 것이라 (딛전 2:3-6)는 것을 제공하셨다.


¡°ÁËÀÇ »éÀº »ç¸ÁÀÌ¿ä Çϳª´ÔÀÇ Àº»ç´Â ±×¸®½ºµµ ¿¹¼ö ¿ì¸® ÁÖ ¾È¿¡ ÀÖ´Â ¿µ»ýÀ̴϶ó.¡± (·Ò 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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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ý¸íÀº Çϳª´ÔÀÇ ¼±¹°ÀΠȣÀÇÀÌ´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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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처벌은 불의하지 않으며, 너무 엄하지도 않음

     처벌의 호됨은 하나님 편에서 증오와 악의의 표시가 아니라, 필요하고 면할 수 없는 최종의 사악의 결과였다. 하나님께서 최종의 사악의 결과를 인간이 이렇게 보고 느끼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실제 사악의 파괴적인 힘에 대항해서라도 그가 적당하다고 보시는 한에서 생존을 유지시키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러한 생존을 영구히 유지시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짓말하시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불가능할 것이다. 즉 그것은 도덕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한 생존은 오직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더욱 더 불행한 근원만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너무 선하셔서, 그렇게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쓸모없고 유해한 존재의 생존을 유지하게 하실 수 없으시다. 그래서 그가 그런 생존을 유지하시는 권세를 희수 하셨기 때문에 사악의 당연한 결과인 멸망이 잇따라 일어날 것이다.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인 호의이며, 그것은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만 영구히 계속될 것이다.


¡°¸ðµç ÁÁÀº Àº»ç¿Í ¸ðµç ¿ÏÀüÇÑ ¼±¹°Àº À§¿¡¼­ ºûµéÀÇ ¾Æ¹öÁö²²·ÎºÎÅÍ ³»·Á¿À¸ç ±×´Â º¯ÇÔµµ ¾øÀ¸½Ã°í ȸÀüÇÏ´Â ±×¸²ÀÚµµ ¾øÀ¸½Ã´Ï¶ó.¡±  (¾à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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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개인의 시험을 아담의 자손들에게 주시지 않은데 대해서 그들에게 부정이 행하여지지 않았다.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낳게 하실 의무가 결코 없다. 그리고 우리를 낳게 하셨다고 해서, 우리 존재를 영구히 영속시키거나 순종하면 영생을 준다는 약속 밑에서 우리에게 시험을 부여까지 하게 하는 공평이나 공정의 율법이 여호와를 묶고 있지 않다.

     이 점을 잘 주목하시오. 요람에서 무덤에까지 오직 죽어 가는 과정에 불과한 현재의 생은 모든 생의 사악과 실망들에도 불구하고 축복이며 은고이다. -내세가 없어도. 대다수가 그렇게 간주하고 있다. 예외는(자살자) 비교적으로 극히 소수이며, 자살자를 우리의 법정이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것으로 거듭 판결했다

     정신적 불안정이 아니었다면 그들이 현재의 축복에서 자신들의 생명을 이렇게 끊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밖에 완벽한 인간인 아담의 행위는 그의 자손들의 행위가 비슷한 상황 아래 어떠했을까를 우리에게 나타내 준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를 생명이냐, 아니면 영원한 고통이냐에 대한 시험 위에 두셨다는 틀린 관념을 받아드렸다. 이에 반하여 처벌에는 영원한 고통이란 일이 결코 암시조차도 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의 순종하는 자녀들에게 주시는 그의 은고나 축복은 생명이다. 즉 고통, , 다른 모든 부패하는 요소와 죽음이 없는 연속적인 생명이다. 아담은 이 축복을 최대한으로 받았다. 그렇지만 만일 그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 이 "선물"을 빼앗길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2:17) 

     그는 죄의 처벌로서 고통 속에 있는 생애는 전혀 몰랐다. 영생은 순종하는 사람들 이외에는 아무에게나 아무데도 약속되어 있지 않다.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생명의 반대인 죽음은 그가 규정하신 처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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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µ¿øÇÑ °íÅëÀÇ ±³¸®´Â:
1.
¼º¼­ÀûÀÌ ¾Æ´Ï´Ù.
2.
Çϳª´ÔÀÇ ¼ºÇ°°ú ÀÏÄ¡ÇÏÁö ¾Ê´Â´Ù.
3.
Çϳª´ÔÀÇ °èȹÀÇ ºÎºÐÀÌ ¾Æ´Ï´Ù.

     영원한 고통은 구약성경에 아무데에도 암시되어 있지 않으며, 신약 성경에 오직 소수의 진술이 그것을 가르치는 것 같이 보일 정도로 오해될 수 있다. 이것들은 요한계시록의 상징용어들 중에나, 우리 주님의 말씀의 비유들과 수수께끼들 중에서 발견된다

     이것들은 사람이 듣고도 깨닫지 못하고(8:10) 현재에도 오직 조금 더 낫게 깨닫고 있다고 생각된다. "죄가 지불하는 삯은 죽음이다."(6:23) "죄를 짓는 영혼-그것이 죽을 것이다." (18:4)

     많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아담이 맛보던 비슷한 영생을 얻기 위한 시험과 기회를 각자에게 부여하시는 대신, 그의 자손이 아담의 정죄를 같이 나누도록 허락하신다는 점에서 불공정하다고 상상했다.

      그러나 만일 생명을 얻기 위한 세상 사람들이 가질 기회와 시험은 아담이 가졌던 것 보다 훨씬 더 호의적일 것이라는 것과 그것 역시 하나님께서 아담의 자손이 그의 처벌을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같이 나누도록 하는 계획을 채택하셨기 때문이다라는 것을 이제 보여주면, 그러한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말할까? 우리는 사실 그렇다고 믿으며, 그것을 명백하게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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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íÀü (15: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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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ÀÏ ±×¸®½ºµµ ¾È¿¡¼­ ¿ì¸®ÀÇ ¹Ù¶ó´Â °ÍÀÌ ÀÌ»ý»ÓÀÌ¸é ¸ðµç »ç¶÷ °¡¿îµ¥ ¿ì¸®°¡ °¡Àå ºÒ½ÖÇÑ ÀÚ¸®¶ó.

¡°±×·¯³ª ÀÌÁ¦ ±×¸®½ºµµ²²¼­ Á×Àº ÀÚ °¡¿îµ¥¼­ ´Ù½Ã »ì¾Æ Á×¾î ÀáÀÚ´Â ÀÚµéÀÇ Ã¹ ¿­¸Å°¡ µÇ¼Ì½À´Ï´Ù.

¡°Á×À½ÀÌ ÇÑ »ç¶÷À» ÅëÇÏ¿© ÀÖ°Ô µÇ¾úÀ¸¹Ç·Î, Á×Àº »ç¶÷ÀÇ ºÎÈ°µµ ÇÑ »ç¶÷À» ÅëÇÏ¿© ÀÖ°Ô µÇ¾ú½À´Ï´Ù.

¾Æ´ã ¾È¿¡¼­ ¸ðµç »ç¶÷ÀÌ ±×ÀÇ ÀúÁÖ¸¦ ³ª´« °Í °°ÀÌ...

±×¸®½ºµµ ¾È¿¡¼­ ¸ðµç »ç¶÷ÀÌ ¸¸À¯ÀÇ È¸º¹ÀÇ ÃູÀ» ÇÔ²² ³ª´«´Ù.

±×¸®½ºµµ°¡ ¾Æ´ãÀÇ ÀÚ¼ÕÀ» »ç¼Ì´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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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을 
정죄 하시는데 전시된 
지혜
, 사랑, 공정

     하나님께서는 정죄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에게 전해진 것같이, (5:18) 그는 인류를 위해서 새 머리, 아버지, 생명을 주는 자를 정하셨으며, () 안에서 믿음과 순종을 통해서 모든 사람이 변화될 수 있다 (5:19)는 것과 아담 안에서 죽음의 저주를 같이 나눈 것같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만유의 회복의 축복을 같이 나눌 것을 보증하셨다

     교회는 예외임. (5:12,18,19) 따라서 더럽히지 않고 죄가 없는 자 (7:26) 이신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께 관하여 아담의 죄의 완전한 청산 해결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ÇÑ »ç¶÷ÀÌ Á˸¦ ¹üÇϹǷΠ¸»¹Ì¾Ï¾Æ ±×(¾Æ´ã) ¾È¿¡¼­ ¸ðµç »ç¶÷ÀÌ ±×ÀÇ ÀúÁÖ, ±×ÀÇ Ã³¹úÀ» °°ÀÌ ³ª´« °Í °°ÀÌ, ¿¹¼ö´ÔÀº ±× ÇÑ »ç¶÷ÀÇ Ã³¹úÀ» °±À¸¼ÌÀ¸¹Ç·Î ¾Æ´ã»ÓÀÌ ¾Æ´Ï¶ó, À¯ÀüÀ¸·Î ±×ÀÇ ¾àÁ¡, ÁË, ó¹ú °ð Á×À½À» °°ÀÌ ³ª´« ±×ÀÇ ¸ðµç ÈÄ´ë(¸ðµç Àηù)¸¦ »ç¼Ì´Ù. ±× ÀڽŠÈìÀÌ ¾ø°í, Çϳª´Ô¿¡°Ô¼­ ½ÂÀεǰí, ¿¹¼ö´Ô ¾È¿¡ ¸¶Âù°¡Áö·Î ÁË·Î ¶§°¡ ¹¯Áö ¾ÊÀº ÈÄ´ëÀÇ ¿ÏÀüÇÑ ¾¾(Àηù)¿Í ´õºÒ¾î, ¿ì¸® ÁÖ´ÔÀ̽ÿÀ ¡°»ç¶÷À̽Š±×¸®½ºµµ ¿¹¼ö‚(µóÀü 2:5)´Â ¾Æ´ã°ú ±×°¡ ÇüÀ» ¹Þ¾ÒÀ» ¶§, ±×(¾Æ´ã)¾È¿¡ ÀÖ´Â ¾¾(Àηù)¸¦ À§Çؼ­ ¿ÏÀüÇÑ ¼ÓÁ˹° ´ë°¡·Î¼­ ±×(¿¹¼ö)ÀÇ Àΰ£ »ý¸í°ú Á÷À§ ÀüºÎ¸¦ Á̴ּÙ.

 

Grave15B.jpg (5243 bytes)

¡°¹«´ý ¼Ó¿¡ ÀÖ´Â ¸ðµç »ç¶÷ÀÌ ... ³ª¿Ã °ÍÀÌ´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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µÎ ¹ø°ÀÇ ±âȸ ´ë ù ¹ø°ÀÇ °³°³ÀÇ ±âȸ

     아담과 그의 자손의 생명들을 완전히 사신 후, 그리스도는 그의 새 계약의 조건들 받아드리고 따라서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식구가 되고 영생을 받을 아담의 자손 전부를 그의 씨(자식들)로 양자를 삶을 것을 제안하였다

     따라서 구속자가 "자기 자손(자기 조건에 의거하여 양자 될 것을 받아드리는 수만큼 아담의 자손)을 볼 것이고 자기 날을 길어지게 할 것이다.(순종한 상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여하신 인간 단계보다 더 높은 단계로 부활)." (53:10) 

     그리고 모두가 있음직하지 않은 방식으로 곧 예수님의 생명과 그의 후대를 희생함으로 된다. 따라서 기록되었다.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처럼 또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교정된 번역" (고전 15:22)

     아담의 타락을 통해서 우리가 받은 상처(우리는 불공정을 당하지 않았음)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호의로 충분히 상쇄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조만간(하나님의 ¡°ÀûÀýÇÑ ¶§¡±) 아담이 죄를 범하기 전에 맛보던 같은 위치로 회복되는 충분한 기회를 가질 것이다

     현재에 충분한 지식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이 은혜의 즐거움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아이들과 미개인들을 포함하여 그러한 사람이 대다수) 다음 시대- "앞으로 다가올 세상" 현재시대 뒤를 따르는 경륜/시대- 에 확실히 이 특권을 가질 것이다. 이것 때문에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 나올 것이다." (5:28, 11:43)

     이 시대나 다음 시대에 각자가 우리 주님 예수께서 주신 속죄물 대가와 그(각자)의 잇따르는 특권을 충분히 깨닫게 될 때, 각자는 아담의 경우처럼 시험을 치르는 중에 있는 것으로 고려된다. 복종은 영속하는 생명을 초래하고, 불복종은 영속하는 죽음("둘째 사망"을 초래한다.

     그러나 완전한 복종은 복종을 행할 수 있는 완전한 능력이 없이 아무에게서나 요구되지 않는다. 은혜의 계약 밑에서 복음시대에 교회 구성원들은 육신의 약점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결핍을 벌충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그들에게 귀여 된 그리스도의 의를 품고 있다

     신의 은혜는 천년시대에 세상의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들"에게 역시 작용할 것이다. 실제의 완벽에 이르게 될 때까지 (천년시대 종결 전에 모든 사람의 특권일) 절대의 도덕적 완벽은 기대되지 않을 것이다. 새 계약 밑에서는 각 사람의 행위가 그 자신의 장래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점에서 속죄물과 새 계약의 결과인 그 새 시험은 에덴에서 있던 시험과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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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이것은 인류의 어떤 사람들에게 영생을 얻기 위한 두 번째의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응답은 조상 아담의 불순종 때문에 그 자신과 아직 "그의 허리 속에 있는" 모든 그의 자손은 영생을 얻을 첫 번째의 기회를 잃었다.

      ±× º»·¡ ½ÃÇè ¹Ø¿¡¼­ ¡°Á¤ÁË°¡ ¸ðµç »ç¶÷¿¡°Ô ³Ñ°ÜÁ³´Ù.‚ ±×·¡¼­ Çϳª´ÔÀÇ °èȹÀº ±×¸®½ºµµÀÇ ±¸¼ÓÇÏ´Â Èñ»ýÀ» ÅëÇÏ¿© ¾Æ´ã°ú ±×ÀÇ ½ÇÆзΠ»ý¸íÀ» ÀÒÀº ¸ðµÎ°¡ ÁËÀÇ ¸Å¿ì Á˽º·¯¿òÀ» ¸Àº¸°í ÁËÀÇ Ã³¹úÀÇ ¹«°Ô¸¦ ±ú´ÞÀº ÈÄ, ±¸¼¼ÁÖ ¾È¿¡¼­ ¹ÏÀ½À» ÅëÇÏ¿© Çϳª´Ô²² µ¹¾Æ¿Ã ±âȸ¸¦ ÁÖ¾î¾ß ÇÑ´Ù´Â °ÍÀÌ´Ù. ¸¸ÀÏ ´©°¡ ÀÌ°ÍÀ» "µÎ ¹ø°ÀÇ ±âȸ"¶ó°í ºÎ¸¥´Ù¸é ±×·¸°Ô ºÎ¸£µµ·Ï ÇÏÀÚ. ±×°ÍÀº È®½ÇÈ÷ ¾Æ´ãÀÇ µÎ ¹ø°ÀÇ ±âȸÀÓ¿¡ Ʋ¸²¾øÀ¸¸ç, Àû¾îµµ ¾î¶² Á¡¿¡¼­ ±×°ÍÀº ¸ðµç ±¸¼Ó µÈ Àηù¿¡°Ô °°´Ù. ±×·¯³ª ±×°ÍÀº žÀ» ¶§ ÀÌ¹Ì Á×À½ÀÇ Á¤ÁË ¹Ø¿¡ ÀÖ´ø ±×ÀÇ Èļ¼ °³°³ÀÇ Ã¹ ¹ø° ±âȸÀÏ °ÍÀÌ´Ù. ¹«¾ùÀ̶ó ºÎ¸£°Ç »ç½ÇÀº ¸¶Âù°¡ÁöÀÌ´Ù. Áï ¾Æ´ãÀÇ ºÒ¼øÁ¾ ¶§¹®¿¡ ¸ðµÎ°¡ »çÇü ¼±°í¸¦ ¹Þ¾Ò°í, »õ °è¾àÀÇ È£ÀÇÀûÀÎ Á¶°Ç ¹Ø¿¡¼­ ¸ðµÎ°¡ ¿µ»ýÀ» ¾òÀ» ÃæºÐÇÑ ±âȸ¸¦ õ³â½Ã´ë¿¡¼­ Áñ±æ °ÍÀÌ´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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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ðµç »ç¶÷¿¡°Ô Å« ±â»ÝÀÌ µÉ ÁÁÀº ¼Ò½Ä¡±

     õ»çµéÀÌ ¼±¾ðÇßµíÀÌ, ÀÌ°ÍÀÌ ¡°¸ðµç »ç¶÷¿¡°Ô Å« ±â»ÝÀÌ µÉ ÁÁÀº ¼Ò½Ä¡±ÀÌ´Ù. ±×¸®°í »çµµ ¹Ù¿ïÀÌ ¼±¾ðÇßµíÀÌ, ¿ì¸® ÁÖ ¿¹¼ö´ÔÀÌ ¡°¸ðµç »ç¶÷À» À§ÇÏ¿© Àڱ⸦ ¼ÓÁ˹°·Î Á̴ּ١±¶ó´Â Çϳª´ÔÀÇ ÀºÇý°¡ ¡°Æ¯Á¤ÇÑ ¶§¿¡¡±¸ðµç »ç¶÷¿¡°Ô Ʋ¸²¾øÀÌ ¡°Áõ°Å¡±µÇ¾î¾ß ÇÑ´Ù.(·Ò 5:17-19, µóÀü 2:4-6) Àΰ£ÀÌ »ý¸íÀ» ¾ò´Â ÀÌ ±âȸ¸¦ º¹À½½Ã´ë·Î Á¦ÇÑÇß´Ù. Çϳª´Ô²²¼­´Â ÀÌ¿¡ ¹ÝÇÏ¿© ¿ì¸®¿¡°Ô ¸»¾¸ÇϽñ⸦, º¹À½½Ã´ë´Â ´ÜÁö ¿Õ °â Á¦»çÀåÀÎ ±³È¸ÀÇ ¼±ÅÃÀ» À§ÇÑ °ÍÀÌ°í, ´Ù¸¥ ¸ðµç »ç¶÷Àº ÀÕµû¶ó ¿À´Â ½Ã´ë¿¡ »õ °è¾à ¹Ø¿¡¼­ ±× ¿Õ °â Á¦»çÀåÀÎ ±³È¸¸¦ ÅëÇؼ­ Áø¸®ÀÇ Á¤È®ÇÑ Áö½ÄÀ» °®°Ô µÇ°í ¿µ»ýÀ» È®º¸ÇÏ´Â ÃæºÐÇÑ ±âȸ°¡ ºÎ¿©µÉ °ÍÀ̶ó°í Çϼ̴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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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Ö ±×Åä·Ï ¸¹Àº ºñÂüÇÔÀ» ±×·¸°Ô ¸¹Àº »ç¶÷µé¿¡°Ô °Þ°Ô Ç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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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ÀÏ °³°³ÀÇ ±âȸ°¡ ÁÖ¾îÁø´Ù¸é, ¾ó¸¶³ª ¸¹Àº ¼ö°¡ »ý¸íÀ» ¾ò±â¿¡ ÇÕ´çÇÏ´Ù°í ÆÇ°á µÉ±î?

     그러나 그 추구하는 방법에 무슨 이익이 있는가? 아담의 시험과 정죄와 그의 정죄 안에서 그의 후세가 같이 나눔과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모든 사람의 구속과 새 계약 조건 위에 모두에게 영생의 새로운 제공의 긴 과정이 없이, 왜 즉시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얻을 개개의 기회를 부여하지 않는가

     인간이 자주적인 도덕적 행위자이기 때문에 만일 사악이 묵인되어야 한다면 왜 사악의 근절이 그러한 특유하고 우회하는 방법으로 성취되는가? 왜 그렇게 많은 불행으로 얼룩지게 하며, 왜 그렇게 많은 비참함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생명의 선물을 받을 많은 사람들에게 오게 하는가?

     ! 그것이 이 주제의 관심이 중심을 두고있는 논점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의 번식을 다르게 명하셔서, 자녀들이 부모의 죄의 결과인 정신적, 도덕적, 육체적 약점들을 함께 나누지 않도록 하고, 만일 모두가 그들의 시험을 위해서 호의적인 에덴동산 같은 조건을 누려 받으며, 범칙자만 정죄되고 "절단"하게 되도록 창조자가 준비하셨다면, 모든 그런 호의적인 조건들 밑에서 얼마나 많은 수가 생명을 얻기에 합당하고, 얼마나 많은 수가 생명을 얻기에 불합당할 지를 우리가 추정할 수 있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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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확실히 모든 점에서 완벽한 성년 남자의 견본이었던 아담의 경우 하나를 기준으로 취하면, 결점이 없이 순종하고 합당하다고 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결론을 짓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개인들의 판단이상으로 하나님의 율법에 충분한 확신을 그들 속에 깊게 하는 하나님에 관한 분명한 지식과 그(당신)와의 경험이 아무에게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의 지식이 그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순종하는 능력을 주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한다. (53:11) 그러나 4분의 1 이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상상해 봅시다. 아니면 그 이상, 그 절반이 합당하고 나머지 반이 죄의 대가(죽음)를 받을 것이라고 상상해 봅시다. 그렇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다른 나머지 반인 순종하는 사람들이 죄의 경험도 없고 죄를 목격해 본적이 없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들은 금지된 것들에 대해서 언제나 호기심을 느끼고 다만 하나님과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억제할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의 봉사는 그들이 마치 선과 악을 알고, 따라서 그의 피조물의 진로뿐이 아니라, 창조자 자신의 진로를 관리하는 율법을 만드시는 점에서 창조자의 자비로우신 계획의 충분한 이해를 가진 것 같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일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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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다음에 그들의 의지적인 죄의 결과로 죽게 되는 나머지 반도 고찰해 봅시다. 그들은 삶에서 영구히 절단될 것이다.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그의 손의 만듦새인 그의 피조물로서 그들을 기억하시고, 그들을 위해서 또 다른 시험을 주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왜 그렇게 하시나

     그 유일한 이유는 그들이 다시 죽음에서 깨어나게 하고 다시 시험을 치르게 하면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이 더 큰 경험 때문에, 그 때에는 순종하려고 결정하고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일 것이다.

      그러나 비록 그러한 계획이 그 결과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채택하신 것만큼 좋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심각한 이의들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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Çϳª´ÔÀÇ ÁöÇý°¡ Á˸¦ ¾î¶² Çѵµ·Î Á¦ÇÑÇÑ´Ù.

하나님의 일반 율법

     그의 계획이 수행하듯이 죄를 어떤 한도로 제한하는 것이 얼마나 훨씬 더 하나님의 지혜 같을지. 고의로 저지르는 죄가 지불하는 삯(대가)은 생명에서 절단되는 것 곧 죽음(사멸)이라고 선언하는 단 하나의 완전하고 편견 없는 율법을 갖는 것을 우리의 한정된 마음조차도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훨씬 더 좋을지. (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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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Á¤Á˹ÞÀº °³Àθ¶´Ù ±¸¼ÓÀÚ°¡ ¿ä±¸µÉ °ÍÀÌ´Ù.

2. ¡°±×¸®½ºµµÀÇ ¸ö¡±ÀÇ ¼±ÅÃÀ» Çã¶ô ÇÏÁö ¾ÊÀ» °ÍÀÌ´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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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그가 묵인하시는 사악을 제한하신다. 이것은 천년 그리스도의 통치가 사악과 아울러 고의적인 악의 행위자들을 전부 사멸하고, 완벽한 존재들의 충분한 지식과 자유 의지의 순종에 기반을 둔 영원한 정의를 안내하여 줌으로서 된다.

     그러나 각 개인을 개별적으로 먼저 시험하는 것을 제안한 계획에 두 가지의 다른 이의가 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계획에서는 구속자 하나로 사실상 충분했다. 왜냐하면 단 한사람이 죄를 범했으며, 단 한사람이 정죄를 받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의 정죄를 같이 나누었다. (5:12,15) 

     그러나 만일 첫 시험이 개별적 시험이고 인류의 반이 죄를 범하여 개별적 시험으로 정죄되었다면, 이 정죄 받은 개인마다 구속자의 희생이 요구되었을 것이다. 하나의 상실되지 않은 생명은 하나의 상실된 생명을 구속할 수 있으나 그 이상 구속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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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한 계획에 다른 이의는 "적은 무리"-그리스도의 몸, 예수님이 머리와 주님이 되는 동료 -를 선택하고 이들을 신의 본성으로 높이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계획을 심하게 혼란시킬 것이다. 하나님께서 500억의 순종하는 자녀들에게 그들의 권리와 특권과 생명을 죄인들을 위해서 속죄물로 주도록 공정하게 명령하실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 자신의 율법 밑에서 그들의 순종함이 영속하는 생명의 권리를 확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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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만일 그 완벽한 사람들에게 죄인들의 대속자들이 될 것을 요구하였다면 우리 주 예수님과 같이 (12:2) 그 사람들 앞에 놓인 기쁨을 위하여 그들의 형제들의 처벌을 인내할 수 있도록 그 사람들 앞에 특별한 보답을 마련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일 것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 주 예수님께 주신 것과 같은 보답, 즉 신의 본성인 새 본성에 참여케 하고, 천사들과 정부들과 권세들과 여호와의 이름 다음의 모든 이름보다 훨씬 높여지는 보답을 그들에게 주어야 한다면 (1:20,21) 막대한 수가 신의 ´Ü°è¿¡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가 분명히 찬성하시지 않으셨다. 더구나, 그러한 상황 밑에 이 500 억의 사람들이 모두 대등한 입장에 있을 것이며, 그들 가운데 장이나 머리가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계획은 신의 본성으로 지극히 높여진 구속자 오직 한 분과 그 다음에 그리스도가 구속하시고, 아내가 남편과 같이 나누는 것처럼 그의 이름, 영예, 영광과 그의 본성을 같이 나누기 위하여 고통과 자기부정인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사람들 중에 "적은 무리" 를 필요로 하신다.

     대표자 하나 안에서 모두를 정죄함으로서 구속자 하나로 속죄물과 만유의 회복을 위한 길을 여신 하나님의 계획의 이 면모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 면모 안에서 많은 당혹한 것들의 해결을 발견할 것이다. 그들은 한사람 안에서 모든 사람을 정죄함은 불공평의 반대였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다른 한사람의 희생을 통하여 모든 사람을 위하여 의롭다고 인정하심을 제공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연관해서 고려하면,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큰 호의였다. 사악을 묵인하면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고, 속죄물의 은혜가 죄의 처벌과 대등하게 널리 퍼지게 될 때, 사악은 영구히 절멸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의 이 면모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다음 네 가지 점에 대한 충분한 인식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1) 죄의 매우 죄스러움

(2) 그것의 처벌의 성질 (죽음), 

(3) 우리 주 예수님이 주신 속죄물의 중요성과 가치

(4) 각인에게 보답(영생) 아니면, 처벌(영속하는 죽음)의 합당함이 선고되기 전에 개개인이 충분하고 풍부한 시험을 가질 호의적인 조건들로 완전한 복구.

     구속의 위대한 계획과 그 결과로서 그리스도를 통한 "만유의 회복"을 생각하면 사악의 묵인을 통해서 축복이 생긴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다. 아마 딴 방법으로는 그렇게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은 얻은 경험을 함으로, 천사들은 인간의 경험을 관찰함으로 혜택을 받을 뿐이 아니라, 인간과 천사 모두는 그의 계획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을 더 충분히 익히 앎으로서 더욱이 이롭게 된다. 그의 계획이 완전히 성취될 때, 모두가 그의 지혜, 공정, 사랑, 권세를 분명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즉 공정은 신의 법령을 위반할 수 없으며, 자발적인 구속자가 그들의 처벌을 완전히 취소하지 않고는, 정죄된 인류를 공정하게 구할 수 없었다는 이해와 사랑이 이 고귀한 희생을 제공하셨다는 것과 사랑이 구속자를 하나님의 오른편으로 지극히 높이시고, 그에게 권능과 권세를 부여하셔서 그것으로 구속자가 그의 귀중한 피로 사신 사람들을 생명으로 회복하게 하셨다는 이해와 권세와 지혜가 그의 피조물을 위하여 영광스러운 미래를 완수할 수 있으며, 그의 웅대한 계획의 진보와 종국의 성취를 위해서 본의거나 본의 아닌 대행자들을 만드실 만큼 온갖 대항하는 영향을 지배할 수 있었다는 이해를 모두가 가질 수 있게될 것이다.

     만일 사악이 묵인되지 않고 신의 섭리로 그렇게 지배되지 않았다면 이 결과들이 어떻게 달성되었을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 인간 가운데에 일시적인 사악의 묵인은 수반하는 모든 상황을 납득하고, 구제책을 고안하고 그의 권세와 은혜를 통해서 종국의 결과를 명시한 선견지명이 있는 지혜를 따라서 나타낸다.

     복음경륜시대에 죄와 죄를 수반하는 사악은 교회의 훈육과 준비를 위해서 더욱이 사용되었다. 만일 죄가 묵인되지 않았더라면 주 예수와 교회의 희생(신의 본성의 포상을 위한)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본질적으로 지금 인류를 지배하고 있는 같은 하나님의 율법 곧 순종은 생명의 보답이고, 불순종의 응보는 죽음의 처벌이다는 율법이 궁극적으로 모든 하나님의 지적인 피조물들을 지배하여야 한다는 것이 분명히 보이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 주님이 정의를 내리셨듯이 율법은 간단히 한마디 "사랑"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도 분명히 보이는 것 같다.

      ¡°³× ¹ÌÀ½À» ´ÙÇÏ¸ç ¸ñ¼ûÀ» ´ÙÇϸç ÈûÀ» ´ÙÇÏ¸ç ¶æÀ» ´ÙÇÏ¿© ÁÖ ³ÊÀÇ Çϳª´ÔÀ» »ç¶ûÇÏ°í ¶ÇÇÑ ³× ÀÌ¿ôÀ» ³× ¸ö°ú °°ÀÌ »ç¶ûÇ϶ó‚(´ª 10:27) ±Ã±ØÀûÀ¸·Î Çϳª´ÔÀÇ ¸ñÀûÀÌ ¼ºÃëµÉ ¶§ Çϳª´ÔÀÇ ¼ºÇ°ÀÇ ¿µ±¤ÀÌ ÁöÀûÀÎ ¸ðµç ÇÇÁ¶¹°µé¿¡°Ô ³ªÅ¸³¯ °ÍÀ̸ç, Àӽà »ç¾ÇÀÇ ¹¬ÀÎÀÌ ½ÅÀÇ Á¤Ã¥¿¡ ÁöÇý·Î¿î ¸é¸ð¿´À½À» ¸ðµç »ç¶÷ÀÌ ±ú´Ý°Ô µÉ °ÍÀÌ´Ù. ÀÌ°ÍÀº ¼¼»óÀÇ Åµ¿ ÀÌ·¡·Î °Å·èÇÑ ¼±ÁöÀÚÀÇ ÀÔÀ» ÅëÇÏ¿© ¸»¾¸ÇϽŹ٠¸¸À¯ÀÇ È¸º¹(Çà 3:21)À» Çϳª´Ô ¸»¾¸À» ÅëÇؼ­ ¾ÕÂÊÀ» ¹Ù¶óº¸¸é¼­, ¿ÀÁ÷ ¹ÏÀ½ÀÇ ´«À¸·Î¸¸ Áö±Ý ±ú´ÞÀ» ¼ö ÀÖ´Ù.

그 날이 목전에 닥쳐있다

"가엾고 실신하는 순례자여, 네 길에 그대로 있어라 - 여명이 가깝다!

참으로 지금 너는 지쳐있다. 그러나 저쪽에 빛나는 광선이 더 밝아지리라.

조금만 더 버티어내라. 휴식을 기다리라.

잠들지 말라, 무겁게 덮치는 고생이 있을지라도.

"삶의 밤은 슬픔에 잠겨있다, 그러나 바라보라 - 여명이 가깝다!

곧 땅의 모든 어두운 광경과 형태가 사라지리라. 두려워 말라!

산봉우리에 머지않아 도달하리라"

기쁨과 평화의 밝은 세상이 이르리라.

"너의 표어는 아직 ¡®희망으로 기쁨¡¯이어야  한다 -여명이 가깝다!

너에게 펼쳐진 여명이 얼마나 영광스러울까! 고무되어라!

너의 허리띠를 띠라, 신을 신어라:

길은 어둡고 길다. 그 끝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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